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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13. <부정공>통덕랑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휘시억묘표(通德郎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諱時億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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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통덕랑공휘시성행장(通德郎公諱時聖行狀)
通德郞公諱時聖行狀 公姓趙氏諱時聖字大而號觀水亭世有顯人爲玉川大家其玄遠之緒則著自勝國而十世祖諱佺追封玉川君九世祖諱元吉號農隱爲門下侍中有大勳勞賜諡忠獻受封玉川府院君故雲仍多居鄉而因以貫焉享于武夷院八世祖諱瑜號虔谷挺生麗季中生進文科官副正我 朝受禪入杜門洞累有旌招不就始移于昇平之富有縣里門及其易簀也 世宗大王遣官 賜禮葬又 命旌表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多士享于謙川院七世祖諱斯文始仕我國朝蔭補左軍司正 贈吏曹參議六世祖諱智崙參禮道察訪 階奉列大夫與四昆季湛樂于相好亭五世祖諱穩以藝學稱世中生進官尚瑞院直長階朝散高祖諱淑璟居咏歸村自公始以行義著除忠順衛金先生麟厚題其墓道曰性度端純行己以恭曾祖諱大春號三灘資品傑特擧業純固不求聞達時除仁明間先見乙巳禍機之漸慨然傷嘆取適林泉亭于漾碧江上而嘗與湛齋玉峰結道義亦講論經學勸葬節義優遊以終松沙奇公宇萬銘其誌淵齋宋先生表其墓曰金先生取友必端又曰泯跡遯世不輟其囂囂之樂志尚無與倫比祖諱懋擩染家庭學識精透薦除參奉考諱晫蔭補宣敎郎妣興德張氏副正字熙世之女公以 萬曆甲午生于咏歸村私第幼有異質有如成人持身謹恪讀書求志手不釋卷天性極孝事親甘旨無不備至居家遵守先法誠祭篤恩義前後親喪居廬盡禮歛殯哭踊自有中節飲食衰絰各稱其情哀毀骨立送終無憾服闋後朔望省塋出入謁廟因事叔父如所生晨昏定省晴雨不廢見人之善若己有之聞人之惡反己尋之味人所不味行人所難行學問淵博尤長於禮書多少發明惜乎家藏遺集盡入於六丁之收而惟有戒書一條曰半絲半粒常思文公之家訓一簞一瓢豈改陋巷之樂道事載輿覽其實德篤行如此故累擧鄉道狀聞 除通德郎 當宁辛卯南中多士以公之孝學及適曾孫泰望事 上言請褒蒙 允旌閭吏判金綺秀書鏤板後孫學洙尸其事而終始焉卒于壬午三月十九日葬于順天府雙巖面仙巖洞竹村後乾坐原配廣州李氏僉正瀷女進士疑問之孫生二男一女長曰維綱取全州李氏忠順衛修敏之女次曰維紀娶延安李氏忠順衛汝湛之女女安汝相竹山人維綱生三男長曰之藩娶昌寧曺氏嚮之女次曰之賓娶廣州李氏哲臣女娶靑松沈氏之涉之女娶海州呉氏楫女次曰之珣娶廣州李氏章遠之女長房男之藩早卒無育以叔弟之珣子泰望爲嗣泰望娶文化柳氏生二男一女長曰崇夏進士次曰器夏出後女適梁濟夏濟州人側出男載夏熙夏光夏也之賓生二男一女長曰台望娶晋州鄭氏生一男曰成夏次曰弘望出系慶泰士人偰城洪汝鵬其壻也之珣生二男長曰重望娶長澤高氏卒無育次曰泰望出系之藩重望以出後弟泰望之子器夏爲嗣而曾玄以下多不可盡錄也嗚呼府君之宿德至行如此而恐或澤斬己久文獻無徵故謹按家牒叅以見聞撰此其萬一如右以爲後日知德君子採擇之資焉 九世孫 鍾悳 謹述 통덕랑공휘시성행장(通德郎公諱時聖行狀) 공의 성은 조씨로 휘는 시성(時聖)이요, 자는 대이(大而)며, 호는 관수정(觀水亭)이다. 집안 대대로 영문(令紋)이 있어 옥천의 대가가 되었으며, 건곡선생 휘 유(瑜)의 후손이요, 삼탄선생 휘 대춘(大春)의 증손이다. 조의 휘 무(懋)는 선업을 이어 학식이 정박하여 참봉을 천제하였고, 고의 휘 탁(晫)은 음보(蔭補)로 선교랑(宣敎郎)이 되었다. 비는 흥덕장씨(興德張氏) 부정(副正) 자(字) 희세(熙世)의 딸이었다. 공이 만력 갑오년(一五九四)에 영귀촌 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몸가짐을 삼가하고 글을 읽을때는 뜻에 주의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천성이 지효하여 어버이를 섬길때는 맛있는 반찬을 항상 준비하였으며 집에 거하여 선규(先規)를 지켜 봉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전후의 친상에 예제를 다하여 시묘하며 영빈장제를 스스로 법도에 맞게 하고 최질 미죽을 각기 그 정에 따라 하며 애통해하다가 몸이 헐어 뼈만 남았으나 송사(送死) 지절을 여감이 없이 하였다. 복을 벗은 뒤에도 삭망 때마다 성묘하고 출입할 때마다 사당에 참알하며 숙부를 부모같이 섬겨 신혼정성을 종신토록 폐하지 않고 사람들의 착한 것을 보면 내가 가진 것같이 하고 사람의 악한 것을 들으면 자기 몸을 돌이켜 찾으며 사람들이 맛보지 않은 것을 맛보고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바를 행하였다. 학문이 깊고 넓었으며 더욱 예서에 밝아 다소 발명한 것이 있었는데 아깝도다. 가장 유집은 화재로 소실되고 오직 경계한 글 한 조목이 있으니 가로되 『반오리 실과 반 알의 쌀은 항상 주잠 가훈을 생각할 것이며 한 도시락과 한 표주박에 있어서는 어찌 안 자의 즐거움을 고칠 것인가.』 하였다. 이 사실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등재되었다. 그 진실한 덕과 독실한 행의가 이와 같은고로 여러번 고을과 도의 천장이 있어 통덕랑을 제배하였다. 금상(今上) 신묘년에 남중의 많은 선비가 공의 효행과 증손 태망(泰望)의 사행을 주청하여 이문을 정포하였는데 이조판서 김기수(金綺秀)가 현판에 글씨를 쓰고 후손 학수(學洙)가 그 일의 시종을 주장하였다. 임오년 三월 十九일에 별세하니 순천 쌍암면(雙岩面) 죽림동후(竹林洞後) 건좌원(乾坐原)에 안장하였다. 배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첨정(僉正) 익(瀷)의 딸이었다. 남은 유강(維綱), 유기(維紀)요, 여는 죽산(竹山) 안여상(安汝相)의 처이며, 손자 지번(之藩), 지빈(之賓), 지순(之珣)은 장방출인데, 지번이 일찍 죽고 후사가 없어 조카 태망(泰望)을 후사로 삼고 증손 숭하(崇夏)는 진사요, 기하(器夏)는 출계하였으며, 여는 제주 양제하의 처요, 재하(載夏), 희하(熙夏), 광하(光夏)는 태망출이요, 지빈의 남은 태망(台望), 홍망(弘望)인데, 홍망은 경태(慶泰)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여는 설성(偰城) 홍여붕(洪汝鵬)의 처이고, 지순의 남 중망(重望)은 혈육이 없어 조카 기하(器夏)를 후사로 삼았고 그 외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부군의 후중한 덕망과 지극한 행의가 이와 같았는데 이미 五세가 지났고, 문헌으로 증거를 할 수가 없는고로 삼가 보첩을 살피고 견문을 참작하여 만에 하나를 가려 위와 같이 기술하여 후일 지덕 군자의 채택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九세손(世孫) 종덕(鍾悳) 삼가 기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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